제 1장 자유에 대하여
“합리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답변을 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칼 포퍼라는 철학자이다.
20세기(1902~1994)를 살다 간 칼 포퍼의 이야기는 왠지 친숙한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결코 고리타분하지 않은 신선함을 가지고 있었다.
격동의 20세기를 살아 온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합리주의자이자 계몽주의자’라고 고백하면서 구시대적 사상에 매달리고 있다고 토로하지만, 합리주의 계몽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의 결과물에 대한 지나친 겸양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가 이해하고 주장하는 합리주의는 다음과 같다.
합리주의자는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는 것보다 다른 이에게서 배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나아가 남의 의견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에 대한 남의 비판을 쾌히 받아들이고 남의 생각을 신중히 비판함으로써 타인에게서 기꺼이 배울 의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합리주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옴과 동시에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문장이 하나 있다.
‘인간은 철저하게 이성적인 존재’라는 주장은 철저하게 비이성적이다.
그는 자신의 실수와 오류에 대한 타인의 비판을 통해 ‘학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이야기한다. 그 속에는 인간적 측면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철저히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비판적 논의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우리 삶에서 이러한 경우는 아주 드물다. 분명 비판적 논의의 태도에는 이성적 태도가 필요하지만, 주고 받기(give and take)라는 인간의 소통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과정은 다분히 비이성적이며 비논리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없는 비판적 논의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 개인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자아 커뮤니케이션 만으로는 자기 비판에 이르기 어려우며, 자기 비판까지 이르려면 다른 이들의 비판의 논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여러 비판적 논의를 토대로 자기 비판의 과정에 다다랐을 때는 고독하게 자아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계몽주의 사상가, 진정한 합리주의자는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상대를 확신시키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이야기하는 내내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상대방의 지적 자주성을 충분히 존중하기 때문에, 중대한 문제를 두고 상대방을 설득하기 보다는 가능하면 합리적이고 잘 다듬어진 형태의 비판을 유도할 것이다. 설득보다는 상대방을 자극하여 자주적 의견을 형성할 것을 요구한다. 자주적 의견의 형성은 계몽주의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를 진리에 더 근접하게 해줄 뿐 아니라, 자주적 의견은 그 자체로도 존중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의견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더라도 나름대로 존중을 하는 것이다.
계몽주의 사상가가 상대의 동조를 구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논리 그리고 어쩌면 초등 수학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주장을 결코 절대적일 수 없고 논리적 결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백 퍼센트 확증될 수 없다는 것). 우리는 여러 가지 논거를 따져보고 어떤 논거가 타당한지, 어떤 주장의 근거가 되는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의견 형성’에는 ‘자주적 결정’이라는 요소가 포함되는 셈이다. 그 자주적 결정이 한 사람의 의견을 그만큼 인간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만든다.
<자유에 대하여, 민주주의로의 안내>
위의 논의는 ‘제1장 자유에 대하여’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염두 해야 할 점이 있다. 합리주의와 계몽주의는 정치적 자유를 필요조건으로 요구한다는 점이다. 또한 칼 포퍼는 우리가 범할 수 있는 오류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을 한다.
자유에 대한 사랑과 합리주의 및 계몽주의를 동일시하거나 혹은 그 둘이 매우 가까운 관계라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유를 향한 갈망을 확실히 원시적인 것이어서 동물에게도 확인되며 어린 아이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정치와 합쳐지면 자유는 문젯거리가 된다. 인류의 공존에는 당연히 ‘모든 개인의 무제한적 자유가 불가능하다’는 뜻이 내포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뭐든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자유롭게 빼앗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실로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보이지 않는가? 자신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그렇기 때문에 공존을 위해 필요에 의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며, 그 제한은 모든 시민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칸트철학적 원칙인 것이다.
우리는 자유로운 국가에서 살고 있는가? 자유로운 국가의 기준은 무엇일까?
칼 포퍼가 제시하는 기준은 이렇다.
국민의 다수가 피를 흘리지 않고 통치자를 물러나게 할 수 있다면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다.
그는 민주주의라는 용어의 정의에 말려들기 보다는 진짜 가치가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통일 전 동독도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가까운 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던가?
맹목적인 자유가 가진 위험성에 대하여…
나는 민주주의 정치 세계를 우리가 알고 있는 최고의 것으로 간주하긴 했지만, 이 사실을 민주주의나 자유의 덕으로 돌리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자유는 생필품을 우리 집 대문까지 날라다주는 공급자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우리 일을 대신 해 주지 않는다. 경제성장의 기적을 말할 것도 없다. 자유롭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면서 자유를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어리석은 일일뿐더러 극히 위험하다. …….. 민주주의나 자유에 대해 단정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인간의 능력이 인류의 복지를 조금 더 좌우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자유에 대한 믿음이 항상 승리로 이어진다고 믿는 것은 옳지 않다. 그 믿음이 패배로 이어질 것에도 대비해야 한다. 자유를 선택하면 그것과 함께 죽을 각오도 해야 한다. ……….. 민주주의와 자유는 일천년을 약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치적 자유가 이것 또는 저것을 약속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기에 그것을 택한다. 우리가 그 가능성을 깨닫느냐 마느냐는 수많은 요소에 달려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전에 태어난 할아버지가 마치 우리가 처한 현재의 문제에 대해 나긋나긋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칼 포퍼의 논리와 통찰력에 압도당해 허우적 거리는 내 모습이 참 즐겁기도 하고 골치가 아프기도 하고 그렇다. 실로 나 자신부터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편협하고 맹목적으로 바라보았으며, 어쩌면 그에 대한 책임을 처절하게 배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낸 것이며, 끊임없는 비판적 논의, 자기 비판, 성찰, 반성이 그 자유를 지속시키는 근원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겠다.
